
정희정의 <사건에 지평선>에 관하여
영화의 제목인 ‘사건의 지평선’은 블랙홀 주변의 경계를 의미하는 물리학적 개념이다. 이 경계를 넘어가면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외부에서 관측할 수도 없고 그것이 외부로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일종의 완전한 단절과 분리가 가능한 경계인 셈이다. 우리는 이것을 물리적인 표면이자 공간으로 상상하기 쉽지만, 이것은 물질적 차원이 아니라 수학적 차원의 경계에 가깝다. 대지와 하늘을 가르는 동시에 맞닿아 있는 듯 보이는 ‘지평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지평선은 시야의 한계에 의한 착시 효과의 일종이다. 그러나 해변에 서서 지평선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하고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파도를 거슬러 또는 파도에 이끌려 지평선을 향해 가다 보면, 언젠가 그것에 다다를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시간을 쪼개어 그것을 꾸미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떠올린다. ‘무지개 시간표’를 만드는 일은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방학을 맞아서 습관처럼 으레 하던 일이었다. 설렌 마음으로 맞이한 방학 첫날, 부푼 기대와 함께 시간표를 만들던 시간이 무색하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어느새 시간표는 잊히기 일쑤였다. 형형색색으로 꾸며진 시간표는 실제의 기준으로 작동하기보다는, 차라리 희망과 결심을 담아낸 소망의 투영에 가까웠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투명한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시간이 “질서정연하게 펼쳐진 사물” 같은 것이므로 “그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던 순수한 믿음 말이다.
그러나 실제의 시간은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작가는 무지개 시간표에서 더 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지 않는다. 차라리 블랙홀의 이미지를 닮아 있는 그것은 작가에게 정체 모를 불안감을 안겨줄 뿐이었다. 사실 그 불안은 작가만의 것은 아니었을 테다. 거북이의 형상으로 시작해서 십장생도로 끝이 나는 영화의 구성이 드러내듯, 영원불멸과 무병장수에 대한 염원은 시간과 수명에 대한 인간의 오랜 불안에서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과 형으로 이루어진 십장생도가 현실과 대비되는 세계를 암시하듯, 그것은 실제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어떤 믿음과 소망의 영역에 위치한 것이었다.
첫 장면에는 키와림 작가의 <사물들 Les choses>(2025)이 강릉에 소재한 옛 함외과의원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2025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에서 진행된 동명의 워크숍에서 작가는 언뜻 보아 소품처럼 보이는 ‘사물들’을 이야기를 풀어가는 매개체로 사용한다. 사물들은 저마다 이야기의 ‘몸’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이러한 탄생의 과정을 주재하는 것은 참여자들의 기억과 상상력이다. 즉, 사물들은 저마다 기억과 상상이 투사된 매개체가 된다. 그로써 이것들은 기존의 기능적 쓸모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존재론적 가치를 획득한다. 음악으로 특유의 불안한 정서를 환기하는 작가의 역량은 <사건의 지평선>에서 특히 두드러진 지점이다. 화려한 색으로 꾸며진 무지개 시간표나 형형색색의 십장생도가 무색하게, 불안한 운율이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가시화하며 이끌어간다.
김윤진 평론가
http://m.nemaf.net/bbs/review/357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