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달 Paper Moon
<달 月>
곧 어둠이 내릴 것이므로 나는 눈을 부릅떠야 했다. 완벽한 달(月)을 그리고자, 한낮부터 밤을 기다리며 초침이 가리키는 밤과 낮의 갈림길이 나타날 곳을 지도에 표시한다. 그런데 아무리 하늘을 쳐다봐도 새털 같은 구름만 가득, 정오의 낯익은 풍경만이 눈앞에 매달려 있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깜빡 잠이 든다.
<곡 哭>
어딘가에서 희미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검은 호수 앞에 지천으로 널린 철쭉이 산을 빨갛게 물들고 있다. 붉은 산은 사이렌을 울리며 구슬피 곡(哭)을 한다. 누가 죽은 걸까? 뒤를 돌아보면 가을 나뭇잎이 우수수 떨이지고 있는데 발끝으로 나타나는 길은 고향의 봄이다.
<벽 壁>
철조망으로 뒤덮인 하얀 벽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가까스로 벽을 올라 건너다보니 사방 벽 안에서 깊은 잠에 빠진 듯 누워 있는 사람이 보인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문득 바람을 타고 멀리서 북소리가 들린다.
<불 火>
동서남북이 사라진 빽빽한 숲에서 같은 풍경이 반복되고 주위는 새까만데 멀리서 불빛이 보인다. 빛을 따라 걸으니 가까워질수록 지독한 악취가 대기를 감싼다. 마침내 냄새조차 무감각 해지자 눈앞에 집이 통째로 불타고 있다.
<방 房>
불타던 집은 연기만 자욱한데 뒷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고요하고 따스하다. 어쩐지 전에 와본 것 같은 집에 성큼성큼 들어가 방문을 연다. 배치된 사물 하나하나, 풍기는 냄새와 분위기. 머무른 흔적들. 나는 이곳을 안다.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물들이다. 카메라 옵스큐라처럼 세상의 모습을 은밀하게 담고 있는 상자 속에서 우리는 휴식, 잠, 사랑, 병, 죽음 등을 경험한다. 삶이란 어쩌면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는 게 아닐까?
<창 窓>
창문으로 밤과 낮의 갈림길이 네모난 달빛을 만들며 새어 들어온다. 나와 나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채우면서 조용히 내 몸을 모두 덮는다. 나는 종이에 달을 그린다.
<꿈 夢>
눈을 뜨고 보는 풍경은 하나의 공통된 세계지만, 눈을 감으면 각자 자신만의 풍경 속으로 되돌아간다. 하늘에 뚫린 하얀 구멍이 진짜 달일까? 아니면 종이 위에 그려진 검은 점이 진짜 달일까. 잠과 불면 사이에서 일어난 기록이 종이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