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ed Island, de Heejeong Jeong
Turbulences Video (13페이지)
https://videoformes.com/wp-content/uploads/2025/04/TV124.pdf

장-폴 파르지에
프랑스 미술 · 영상 비평가 , 《 Art Press 》 편집위원 / VIDÉOFORMES 클레르몽페랑 국제 비디오 페스티벌 ) 예술감독 역임
〈벌거벗은 섬(Naked Island)〉정희정
한국의 예술가이자 화가이며 비디오 작가인 정희정은, 자신이 직접 그려 색칠한 섬인 〈벌거벗은 섬〉을 통해, 잃어버린
낙원이 다시 살아 돌아온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상실은 매 순간 반복되지만, 그 반복은 연속적인 부활의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감각의 핵심 원인은, 작가가 이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선택한 매우 길고 매우 느린 수평
이동(travelling latéral)에 있다. 이 이동은 찬란한 색채로 포화된 경이로운 풍경과 환상적인 사건들로 가득 찬 세계를
그려내며, 그것들은 허구의 지형학적 굴곡 속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VIDEOFORMES 2024『Turbulences Vidéo #123』카탈로그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며 함께 실린 문호경(Ho Kyung Moon)의
글은,이 회화적 구성이 ‘산수화(Shanshui 또는 Sansuwha)’라 불리는 한국 전통 회화 장르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는 ‘산과 물’을 뜻하며, 길고 짧은 종이 두루마리에 그려져, 천천히 펼쳐가며 세부를 감상하는 회화 형식이다.
이제 더 이상 종이 위의 작품이 아니라 디지털 매체 위의 작업이기에, 관객은 거대한 스크린, 말 그대로 압도적으로 큰
화면 앞에 서게 된다. 이 장엄한 풍경은 그 스크린 위에 위풍당당하게 투사된다. 화면의 진행이 느리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은 정희정이 창조한 이 섬의 모든 세부를 음미할 수 있다.
그녀가 ‘벌거벗은 섬(Nue, Naked Island)’이라 명명한 이 섬은, 곧 그 이유를 이해하게 만든다. 작가는 산과 폭포, 언덕과 수면,
강과 나무만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이 풍경 속에 신체들 또한 그려 넣었다. 특히 나체의 신체들을.
물론 모두가 벌거벗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옷을 입고 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은 황갈색 초원 위에 평온하게
누워 있으며, 그 위로는 황금빛 잎들이 드리워져 있다. 흰 드레스를 입은 또 다른 여인은, 돛 없는 붉은 배가 정박한 선착장에서
시작되는 연녹색의 작은 계단을 오르고 있다.
그러나 곧이어, 언덕 위를 달리는 조깅 무리가 등장한다. 이들은 벌거벗은 채 달리고 있다. 노란색의 타원형 실루엣들로,
성별은 식별되지 않으며, 단순한 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형상들이다. 옷을 입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인간 형상들은 분명히
‘나체’라 할 수 있다. 확실히 벌거벗은 존재는, 덤불 속에 몸을 숨긴 채 성교의 자세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신체다.
서로 얽힌 다리만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곧, 나체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터키색 연못 속에 서 있는
‘꽃-여인’들의 무리다. 붉은 폭포가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이들은 풍만한 가슴과 면도되어 털이 없는 치골을
스치는 공기의 부드러움을 만끽한다. 말 그대로 이중으로 벌거벗은 상태인 셈이다.
이 여성들의 머리 대신 만개한 꽃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가장 자연스럽고 문화적으로 용인된 상태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기쁨을 상징한다. 아시아 문화권에서 체모 표현이 금기시된다는 점을 작가는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성적 쾌락을
꽃으로 변형한 얼굴이라는 은유적 번역으로 훌륭하게 보상한다. 억압된 것의 결정적 귀환. 그것은 쾌락의 영원한 부활이다.
정희정의 벌거벗은 섬은, 그 안의 모든 신체들과 함께, 문명—산업적이고 기술적인 현대 문명이 자연에 가하는 모든 위협과
상실을 넘어 유지되는, 되찾은 낙원이다. 언덕을 점령한 송전탑들과, 동일한 창문을 가진 직사각형 건물들—표준화된 삶을
담고 있는—이 그 위협을 형상화한다.
나는 이 경이로운 움직이는 회화 앞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마도 적어도 세 번은 전체를 보았을 것이다. 그 모든 풍미와 색채,
빛의 변화—태양이 여명에서 황혼까지 이동하고, 달이 떠오르기까지—를 음미하기 위해서. 요컨대, 이 세계를 거주하는
인물들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살아 있는 감정들을 위해서였다. 나는 이 유토피아적 세계의 놀라운 세부를 기억하기 위해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하나의 세계가, 끊임없이 놀라움을 주는 파노라마의 양 끝에서 열리고 닫힌다. 스스로를 하나의 총체로 주장하는 세계다.
이 파노라마를 수행하는 데 물리적·기계적·광학적 장치는 필요하지 않다. 모든 것은 프로그래밍된 계산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작동하는 것은 컴퓨터에 의해 생성된 최고의 운송체, 곧 사이버네틱스의 새로운 단계인 인공지능(AI)이다.
이 전체주의적 장비에 단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이 형상의 기초가 되는 그림들마저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것이다.
해 보라. 그 결과는… 참담하고 절망적으로 정상화된 모습일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가 주도하고, 2024년 6월 2일자 『리베라시옹』에서 미렌 가라이코에체아가 보도한 실험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비규범적인 신체를 창조할 수 없다. “아름다운 여성, 보통의 여성, 뚱뚱한 여성의 초상”을 생성하라고 요구하면, AI는 피부가
밝고, 마르고, 늘씬한 여성만을 만들어낼 뿐, 과체중의 몸은 끝내 생성하지 않는다. 고정관념에의 복종이다.
“우리 얼굴과 신체에 깃든 비대칭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뚱뚱한 여성의 재현은 불가능한 임무다. ‘배를 더 불룩하게 해달라’고
여러 번 요구해도 허리는 여전히 코르셋에 갇힌 듯 과도하게 잘록하다. 가슴만 과장되게 크다. 배 모양 실루엣에 풍만한
엉덩이와 작은 가슴을 지닌 아름다운 여성들을 떠올리며 애도할 뿐이다.”
정희정이 상상한 꽃-여인들을 다시 보라. 그들은 크기도, 체형도 모두 다르다. 나는 여기에서 허무주의적 기술의 우울한
어리석음에 맞서는, 찬란하고 즐거운 저항을 본다. 일종의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증거다. 이 불멸성은 프랑스 혁명 당시
클레르몽페랑 대성당의 현관에 새겨진 문구에서도 선언된다. 나는 VIDEOFORMES 페스티벌에 올 때마다 그 비디오 설치들을
감상하며, 이 문구에 인사를 건네곤 한다.
투쟁이 하나로 수렴되기를 바라며.
추신
투쟁들이 수렴되기를 위하여, VIDEOFORMES가 올해 지아니 토티 (Gianni Toti) 의 작품 〈Gramsciategui, 혹은 포에지미스트들〉
(Gramsciategui, ou les poésimistes)을 프로그래밍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겠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훌륭한
선택이다. 1924년 6월 24일에 태어나 2007년 1월 8일에 사망한 토티는, 1970년대 이탈리아 방송국 RAI의 실험 부서에서 시작해
프랑스, 특히 몽벨리아르의 CICV에서 이어진 그의 비디오 작업을 통해 비디오 아트의 발전에 큰 흔적을 남겼다. 가브리엘 수셰이르
(Gabriel Soucheyre) 가 카탈로그에서 상기시키듯, 그의 작품은 발명성, 과잉성, 시적 집요함, 정치적 헌신으로 특징지어진다.
약 40년 동안 지아니 토티는 마르세유에서 로카르노, 클레르몽페랑에서 상파울루, 로마에서 베를린, 산티아고와 몬테비데오에
이르기까지 모든 비디오 페스티벌의 스타였다. 오늘날에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는 여전히 선구자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대형 스크린이 전시장을 지배하기 이전 시대의 산물임을 표시하기 위해, 작은 브라운관 모니터로 상영되는 55분짜리 단일 블록의
〈Gramsciategui〉(1999)는, 가이야르 홀에서 미하이 그레쿠(Mihai Grecu)와 정희정의 거대한 트래블링들, 혹은 이자벨 아르베르
(Isabelle Arvers)의 수중 몰입(〈Liquid Forest〉)이나 한성남(Sung Nam Ham)의 〈Diver〉와 나란히 놓여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이 모든 현대적 성취는 이미 〈Gramsciategui〉 안에 씨앗으로 존재한다.
한눈에 알 수 있다. 토티는 그들의 선조다.
원문
Jean-Paul Fargier
French art and video critic; editorial board member of Art Press; former Artistic Director of VIDÉOFORMES (Clermont-Ferrand International Video Art Festival)
Naked Island, de Heejeong Jeong
L’artiste coréenne, peintre et réalisatrice de vidéos, Hee- jeong Jeong, avec Naked Island, une île dessinée et coloriée par elle, offre la sensation de retrouver vivant un paradis per- du. Où la perte se répète à chaque seconde, dans le mouve- ment même de ses résurrections successives.
La cause principale de cette sensation réside dans le très long et très lent travelling latéral que l’artiste a choisi comme procédé pour décrire ce monde qu’elle a créé en peignant un paysage merveilleux, saturé de couleurs éclatantes, peu- plé d’évènements fantastiques, disséminés dans les replis du relief de cette géographique fictive.
Le texte de Ho Kyung Moon, qui accompagne la présen- tation de cette œuvre dans le catalogue de VIDEOFORMES 2024 (Turbulences Vidéo #123), nous apprend que cette composition picturale reprend un genre traditionnel de l’art coréen, nommé Shanshui ou Sansuwha. Qui signifie : mon- tagnes et eau. Une peinture exécutée sur des rouleaux de papier plus ou moins long, qu’on déroule peu à peu pour en admirer les détails.
Comme il ne s’agit plus d’une œuvre sur papier mais sur support numérique, les spectateurs sont placés face à un grand écran, un écran immense, où ce paysage somptueux est projeté majestueusement. La lenteur du déroulement nu- mérique permet d’apprécier chaque détail de cette île inven- tée par Heejong Jeong.
Une île qu’elle a qualifiée de Nue (Naked Island). Et l’on comprend vite pourquoi. Car l’artiste n’a pas dessiné et peint seulement des montagnes et des chutes d’eau, des collines et des étendues d’eau, des rivières et des arbres : elle a peint aussi des corps dans ce décor. Et particulièrement, des corps nus. Pas tous, bien sûr, certains sont habillés. Une femme vê- tue d’une robe rouge repose tranquillement allongée dans une prairie rousse, dominée par des feuillages mordorés. Une autre, en robe blanche, gravit un petit escalier verdâtre, qui s’élève depuis un débarcadère où stationne une barque rouge avec son mât sans voile. Mais voici maintenant une troupe de joggers courant nus sur une butte: ce sont des sil- houettes jaunes, elliptiques en ce sens qu’elles ne sont pas sexuées, simplement composées de traits remplis de couleurs mais qu’on peut dire nues puisque nul vêtement n’habille ces formes humaines. Assurément nus, en revanche, sont les deux corps qui s’étreignent, à l’abri d’un buisson, en position coï- tale, dont on n’aperçoit que les jambes enchevêtrées. Et puis
c’est bientôt, apothéose de la nudité, un groupe de femmes- fleurs, debout dans un étang turquoise, au milieu des remous provoqués par une cascade rouge, jouissant de la douceur de l’air qui caresse leurs seins généreux et leur pubis imberbe, rasé, doublement nus donc. Que ces femmes arborent une fleur épanouie en lieu et place de leur tête traduit leur bon- heur de s’exhiber en toute liberté dans leur état le plus natu- rel, culturellement admis. Car il semble que l’artiste prenne en compte l’interdit (en Asie) de représenter des pilosités, mais compense superbement cet interdit par la traduction méta- phorique de la jouissance sexuelle avec ces visages méta- morphosés en fleurs ouvertes, frémissantes. Imparable retour du refoulé. C’est la Résurrection permanente du plaisir.
L’île nue de Heejeong Jeong, avec tous ses corps est un paradis retrouvé, maintenu par-delà toutes les pertes, toutes les menaces que fait peser sur la Nature la Civilisation mo- derne, industrielle, technologique, figurée par ces pylônes qui colonisent les collines et ces immeubles rectangulaires, aux fenêtres identiques, abritant des vies normalisées.
Je suis resté longtemps devant ce tableau merveilleux en mouvement, je crois que je l’ai regardé défiler au moins trois fois pour en goûter toutes les saveurs, toutes les couleurs, tous ses changements de lumière (le soleil le parcours de l’aurore au crépuscule avant que la lune ne s’élève), bref, toutes les émotions vivantes exaltées par les personnages qui l’habitent. J’ai pris quelques photos pour me souvenir des détails surpre- nants de ce monde utopique.
Un monde s’ouvre et se ferme aux deux bouts d’un pano- ramique sans cesse étonnant. Un monde qui se veut une tota- lité. Pour exécuter ce panoramique nul recours à des moyens physiques mécaniques ou optiques. Tout est accompli par des calculs programmés. Est ici à l’œuvre le Véhicule Su- prême généré par l’Informatique, dont s’est emparé le nou- veau stade de la cybernétique : l’I.A. Il ne manquerait plus à sa panoplie totalitaire que les dessins à la base de cette figuration soient eux aussi générés artificiellement.
Chiche, et vous verrez le résultat… désastreux, désespé- rant de normalité. L’I.A. est incapable de créer des corps non normés, si l’on en croit une expérience impulsée par le Washington Post, rapportée par Miren Garaicoechea dans le journal Libération (du 2 juin 2024). Quand on demande à un générateur d’images géré par I.A. de produire un « por- trait d’une femme belle, d’une femme normale, d’une femme grosse », il n’arrive à sortir que des femmes à la peau claire, minces, élancées, et se refuse à produire un corps en sur- poids. Obéissance aux stéréotypes. « L’asymétrie qui habite nos visages et nos corps ? Inexistante. Obtenir une repré- sentation de femme grosse est mission impossible. Même en insistant plusieurs fois avec un « fais-lui grossir le ventre », la taille reste démesurément marquée, comme prisonnière d’un corset monstrueux. Les seins sont, eux, énormes. Pensée émue aux femmes splendides à la silhouette en poire, aux hanches généreuses et aux petits seins. »
Regardez bien encore les femmes-fleurs imaginées par Heejeong Jeong. Elles sont de toutes tailles, de toutes cor- pulences.
J’y vois une résistance magnifique et joyeuse à la bêtise triste des technologies nihilistes. En quelque sorte une preuve de l’Immortalité de l’Âme. Cette immortalité que proclame une inscription, gravée pendant la Révolution Française, sur un porche de la cathédrale de Clermont-Ferrand, à laquelle je ne manque pas d’adresser un salut chaque fois que je viens au Festival VIDEOFORMES pour admirer ses installations vi- déos. Au nom de la convergence des luttes.
Post-Scriptum
Au nom de la convergence des luttes, il faut que je men- tionne cette œuvre de Gianni Toti, Gramsciategui, ou les poésimistes, que VIDEOFORMES a eu la bonne idée de pro- grammer cette année pour célébrer le centenaire de sa nais- sance. Né le 24 juin 1924, Toti est mort le 8 janvier 2007, et son œuvre vidéographique, débutée au service expérimental de la RAI dans les années 1970, poursuivie ensuite en France, en particulier au CICV de Montbéliard, a beaucoup marqué le développement de l’art vidéo, comme le rappelle Gabriel Soucheyre dans le catalogue, par son inventivité, son exubé- rance, son acharnement poétique et son engagement poli- tique. Pendant près de quatre décennies Gianni Toti a été la vedette de tous les festivals vidéo, de Marseille à Locarno, de Clermont-Ferrand à San Paulo, Rome à Berlin, Santiago ou Montevideo.
Il est curieux de constater qu’aujourd’hui comme hier, il fait toujours figure de pionnier.
Diffusé sur un petit moniteur à tube cathodique, pour mar- quer sa provenance d’une époque où les grands écrans ne pullulaient pas dans les salles d’exposition, le bloc de 55 minutes d’un seul tenant de Gramsciategui (1999) ne dépa- rait pas, dans la salle Gaillard, à côté des travellings gigan- tesques de Mihai Grecu et de Heejeong Jeong, dont je viens de parler, ni auprès des immersions aquatiques de Isabelle Arvers (Liquid Forest) ou de Sung Nam Ham (Diver), plus at- tendues mais somptueuses. Tous ces exploits modernes sont déjà en germe dans Gramsciategui.
Cela saute aux yeux: Toti est leur ancêtre.
Pendant près de trente minutes, qui débute dans le noir d’où fusent des stridences avant que surgisse un point rouge qui grandit et s’ouvre comme un tunnel, un mouvement ra- pide, continu, linéaire, vous attire dans les profondeurs d’une matière indéfinissable sinon comme couleur, lumière, pulsa- tions, ondulations corpusculaires. Voilà encore un candidat pour le plus long travelling (avant, numérique) du monde ! Et c’est une image abstraite. Conceptuelle et sensuelle à la fois. Puis, la matière incarnat explorée par la progression ac- célérée se marbre de marron, de violet, d’orange, de jaune et d’un soupçon de vert, avant de déboucher sur une ligne, rouge toujours, fendant le noir. Le noir engendre le blanc et ce sont maintenant des volutes noires et blanches qui vous aspirent en avant par leurs circonvolutions à perte de vue. Et ces arabesques numériques, subtilement géométriques, sou- dain accouchent… d’une souris. Qu’un oiseau de proie (une chouette harfang) bientôt guette et pourchasse. Ces images presque floues, dégradées, provenant d’un film animalier, su- bissent ici un changement de vitesse : accéléré pour la souris, ralenti pour la chouette, dans le but d’accentuer leur puis- sance dramatique. Un drame qui se joue en montage alterné, où la fuite éperdue de la souris et le piqué vers elle du rapace aux griffes déjà ouvertes, s’exaspèrent à chaque changement de plan, jusqu’au sauvetage final, miraculeux, d’une inversion mécanique du mouvement au moment où les serres vont se refermer sur leur proie : un deus ex machina a sauvé la victime à la soustrayant à son destin.
Démonstration que les lois de la Nature peuvent être contrariées. Par quoi ? Par une action politique. Les révolutions se donnent ce but. Au « pessimisme de la raison », le penseur marxiste Antonio Gramsci, opposait « l’optimisme de la vo- lonté ». Voilà pourquoi, la marche en avant de l’image, après la valse de quelques carrés rouges, fait surgir le Monument à la Troisième Internationale, imaginé en 1920, par Tatline. Qui ne sera jamais réalisé mais dont la maquette était exposée dans le Pavillon soviétique de l’exposition internationale de 1937 à Paris. Toti n’insère pas ici une photo de cette maquette mais il fait surgir, torsade par torsade, une reproduction en 3D de ce monument symbolique de la prise du pouvoir du prolé- tariat en Russie en 1917. Ainsi c’est le mouvement du film même qui produit en pièces détachées, assemblées, le Monument, au milieu duquel apparaissent, en photos, deux hommes sou- riants: l’italien Gramcsi et le péruvien José Carlos Mariategui (dont il a fusionné les deux noms dans son titre). Ils ont tous les deux étaient des dirigeants de partis communis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