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별곡] 2013 안양 [예.술.도.가,-藝.術.都.家.] 프로젝트 공모 연계展
조선령 독립 큐레이터
들끓던 낮의 욕망들을 밤의 차가움 속에 용해시키는 것이 우리가 흔히 석양의 풍경에 기대하는 시나리오라면, 정희정의 작품은 예상을 비껴간다.
여기서, 정육점의 고기처럼 번들대는 태양의 빛들은, 낮의 흥분을 식혀주는 대신 하루의 찌꺼기들을 모아 착란적인 폭발을 일으키고 죽어가는 것들의 안식을 방해한다.
오렌지색과 감색의 공기는 몸살감기 걸린 아이의 피부처럼 끈적대고 미끈거리는 덩어리들을 만들어낸다.
색채는 밤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그 생명력은 폭력적인 동시에 관능적이다.
작품도 몸처럼 온도를 잴 수 있다면, 정희정의 작품은 늘 미열을 동반하는 듯 느껴진다.
밤이 오는 순간에도 더위는 가시지 않으며, 열기는 새벽이 올 때까지 빠져나갈 곳 없이 대기 속을 채운다.
정희정의 사진이 거의 야외에서 전개되는 풍경인데도 공간공포증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이곳은, 말하자면, 공백이 없는 세계이다. 색채는 살의 덩어리로 자라나서, 숨막히게 공기를 짓누르고, 비어있는 곳을 꾸역꾸역 채우며 자신의 공간을 확장해나간다.
작가가 묘사하는 세계가 어떤 멀고 초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 변두리라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을 ‘변두리의 박물지’ 계보 속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달동네, 도랑과 둔덕, 논밭과 수풀 사이로 보이는 아파트들(이런 곳에 생뚱맞게 서 있는 아파트는 아마도 비싼 곳은 아닐 것이다), 낡은 놀이터와 오래된 축대가 있는 서울 외곽이나 경기도의 모모한 장소.
이러한 위태로운 풍경 속을 거닐며 그 불안정한 현재를 기록하는 도시 산책자의 시선은 한때 사진의 중요한 임무처럼 여겨진 무엇이었다.
그러나 정희정의 시선은 객관적 기록자의 그것이 아니다. 풍경은 끈끈이 주걱처럼 산책자를 사로잡고 빠져나갈 곳을 차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포획 속에서 낯설고도 익숙한 그 무엇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희정의 두 번째 개인전 <청산별곡>에는 두 가지 경향의 작품들이 섞여 있다.
첫 번째는 올해 7월 관훈 갤러리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경향, 즉 느슨하고 암시적인 내러티브를 가진 부조리극의 무대 같은 연출 사진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그 이후 작업한 도시 변두리의 풍경 사진 계열들이다.
첫 번째 계열의 작품들에는, 죽음, 폭력, 부패를 상기시키는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화면 한쪽 구석에서 진행되는 구타와 그것을 외면하는 방관자의 시선, 이상하리만치 생생한 풀밭에 감싸안기듯 누운 시체들, 각시탈이나 놀이터의 놀이기구 같은 기호들이 배치된 무대는,
일상성과 폭력성이 결합된 기묘한 정서를 보여주지만, 다소 평면적이고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이러한 단점은 두 번째 계열의 작품들에서 상당 부분 상쇄된다.
쉽게 읽히는 초현실주의 코드를 자제하고 현실과 상상의 경계선을 더욱 모호하게 구축하는 조형적 배치와 테크닉을 구사함으로써, 작품은 함축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워졌다.
중심이 비어있는 듯한 풍경들은 집중력과 간결함을 갖게 되었다. 색채는 풍부한 표현성을 획득했다.
뒤샹에서 마그리트에 이르는 미술사적 맥락에 대한 참조와 다큐멘터리적인 감성의 결합은, 일상적 세계의 수수께끼를 매력적으로 드러내준다.
정희정이 보여주는 풍경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간이지만 그러한 사실을 잊을 만큼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알고 있는 풍경이다.
작가는 일단 경치를 촬영한 후 단순한 색보정에서 수십 컷의 합성에 이르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진을 가공한다.
그러나 여기에 일정한 공식은 없다. 스트레이트 사진이냐 구성사진이냐 하는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결국, 사후 보정의 정도와 무관하게,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작위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발견하는 것은 세계 그 자체의 작위성이다.
비어있어야 할 곳을 채우고, 과잉의 살들과, 과잉의 온도와, 과잉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세계의 낯선 손길 그 자체이다.
풍경을 촬영하고 구성하면서, 작가는 자연적 세계 자체의 이러한 작위성을 발견한다.
실제의 풍경인지 아닌지 질문하게 만드는 자연스러움과 인공성 간의 미묘한 균열의 지점에서, 세계는 명료하게 정돈된 겉포장을 찢고 부풀어오른 살을 드러낸다.
작가는 몇 가지 모티브를 통해 이러한 작위성이 드러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작가가 포착하는 풍경은 주로 도시와 도시 아닌 것의 경계선이다.
벌판 위에 서 있는 아파트 단지를 멀리서 조망하거나 산에 올라가서 집들을 내려다보는 등 ‘외부’에서 인간의 마을을 보는 시선이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가 흔히 풍기는 관조의 느낌은 없다.
멀리서 보는 시선은 가까이서는 보이지 않았던 세계의 괴물스러운 정체를 발견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 발견이 특정한 시간대에만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글머리에서 말할 것처럼, 과잉이 드러나는 순간으로서의 석양의 시간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우는 새>에서 우비 입은 여자가 바라보는 풍경이 그렇다.
여기서는 풀도 집도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산 위의 코끼리> 역시, 회색빛 하늘과는 달리 산 위에 길게 늘여진 그림자는 석양을 암시한다.
<기정사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빽빽한 풀숲들 사이에서 오렌지색으로 불타는 노을과 그 노을 속에 비친 낡은 아파트를 본다.
마르셀 뒤샹이 보여준 구멍 속 누드만큼이나 이 장면은 관능적이다.
초록의 풀들은 내장처럼 울퉁불퉁한 촉수를 꿈틀대며 공간을 침범한다.
이 동물적인 느낌의 식물들은 석양의 풍경이 보여주는 괴이함의 일부분이다.
육즙이 떨어지는 듯한 맨드라미의 두꺼운 이파리들은 아파트를 집어삼킬 듯 자라나고, 무성한 수풀은 콘크리트에 구멍을 낼 듯 집을 포위한다.
식물들의 이 노골적인 생명력에 비하면 동물이나 인간들은 무기력해보인다.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우비 입은 여자의 뒷모습은 풍경에 눌린 듯 작아보인다.
이 여자는 세계의 열기에 짓눌린 채 외로이 풍경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방어용으로 입고 있는 우비 혹은 담요는 풍경 속에 숨기 위한 보호막이기도 하다.
비를 피하기 위해 입는 우비는 숨 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자발적으로 호흡을 정지시키는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청산>에서 인물이 뒤집어쓰고 있는 녹색 담요가 이를 암시해준다.
공백 없는 세계의 괴물스러운 촉수는 우리가 있을 장소를 위협하는 동시에 관능적인 손길로 우리를 감싸 안는 것은 아닐까?
폭력과 관능의 결합이 위험한 동시에 매혹적인 것은 이러한 양가성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