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정 작가노트
꿈 속에서 나는 홀로 <대동여지도>를 그려야 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풍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을만한 가장 높은 산을 찾아 힘겹게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니 그것은 높은 빌딩의 난간이었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수십 킬로미터를 떨어질 만큼 끝이 안 보였고 그 곳에서 본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지평선이 전부였다.
풍경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의 눈은 이 세상을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사물에 대한 의인적 체험을 통해 자기를 비추려 한다.
우리는 사람이 살지 않은 극지방에서 일어나는 산사태를 ‘자연재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에서 느끼던 야생에 대한 두려움은 불현듯 나타난 벤치로 산 전체가 ‘디자인 된’ 공원이 되면서 안도감으로 바뀐다.
우리는 세상을 ‘틀’을 가지고 본다.
구조주의적 관점으로 말하면,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우리의 언어를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경은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풍경은 몸으로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 내게 비친 거울 속 풍경은 프로크루스테스 [Procrustes]의 침대처럼 보인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다 침대의 규격에 맞게 다리를 늘렸다가, 길면 잘라냈다는 신화 속 이야기처럼 이상하게 부자연스럽고 절단된 풍경이다.
언제부터인지 안팎이 똑같고, 전국이 똑같은 거대한 복제 공간에 사는 우리는 신화 속 침대에 누운 나그네처럼 서서히 ‘절단된’ 신체가 되어간다.
나는 절단된 몸을 이끌고 흩어진 조각을 찾아 힘겹게 길을 나선다.
걷고 또 걷는다.
꿈속에서처럼 조망을 위해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좌표를 가늠하기 위해 조금씩 멀리 돌아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한다.
같은 장소를 반복하여 걷는 동안 놀랍게도 신체의 절단면이 재생하기 시작한다.
플라나리아처럼 재생된 절단면은 기꺼이 풍경과 접촉하길 서슴지 않는다.
더 가까이, 더 깊숙하게,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냄새와 색깔들이 내 몸을 자극한다.
이 곳은 대체 어디였던가.
같은 장소를 빙빙 돌며 찾은 것은 언제나 거기 있었지만 내가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이었다.
그것은 이 땅에 ‘개발과 저개발’이라는 이분법으로는 보이지 않던 수많은 유동하는 몸들이었다.
그것은 푸른 저녁 어스름이었고, 비릿한 구름 사이로 비친 수정궁이었으며, 비에 젖은 싸이렌 소리였고, 달빛에 붙잡힌 고양이의 그림자였다.
마주친 풍경들을 거울에 비추고 종이에 붙여 꿰매면서 한가지 의문이 들기 시작하였다.
찾아 헤매던 파편 조각이 정말 절단되었다고 생각한 내 몸의 일부일까? 혹시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고향’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산란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이 풍경은 대체 누구의 기억일까.
풍경을 기억한다는 것은 인간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피부의 안쪽을 바라보는 것처럼,
분명히 그 곳에 존재하지만 결코 볼 수 없는 ‘사물 자체’인 것처럼.
풍경(風景)이란 말 속엔 관계를 포함한다.
바람이 사물을 빌어 그 존재를 드러내는 이치이다.
쉼 없이 걷는 동안 마주한 장소들을 빌어, 풍경이란 조망이 아니라 행동이자 동사로, 닫힌 창이 아니라 열린 문으로서 끊임없이 변하는 “장소되기”임을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