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호 이 작가를 추천하다 / 조선령 부산대 교수
정희정의 작업에 대하여
동시대성이라는 브랜드를 갑옷처럼 입고 시대에 뒤진 것들을 혐오할 자세로 무장해있으면서 모든 작업은 이미 리메이크라고 냉소하는 것이 오늘날 ‘슬기로운 작가생활’의 유일한 매뉴얼일까? 알려지지 않은 길에서 아직 이름 없는 것들을 최소한의 자의식으로 추구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시대일까? 자신의 작업을 동시대 미술의 이름으로 잘 닦여 있는 길 위에 안착시킬 생각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정희정은 독특한 작가이다. 정희정은 2013년의 <밤과 낮>(관훈 갤러리) 이후 2016년 <개인극장>(아이공)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5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다소 초현실주의적으로 정향된 기호들을 사용했던 초기에 비해, 점차 해독 불가능한 감각과 사물들을 다루면서 어떤 ‘촌스럽기 그지없는’ 세계, 모든 것이 부풀어오르고 흘러넘치고 노골적으로 뻔뻔한 세계를 매혹적으로 펼쳐보였다.
작가가 사용하는 회화, 사진, 영상 등 여러 매체 중에서 최근 중점적으로 실험하고 있는 플래시 애니메이션 작업은 매체를 다루는 방식과 세계를 보는 시각 양쪽 면에서 정희정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준다. 경기도미술관 전시 <시간 수집자>(2015)에서 성북예술가압장 전시 <없는 풍경>(2018)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확장되어온 이 유형의 이 작업을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사실 의문이다. 여기서 움직이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은 이미지가 담긴 틀 자체(스크린 자체)이다. 플래시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기술적으로는 매우 단순하게 완성한 이 작업들은 한 방향으로 화면 전체가 흘러가게 만든 일종의 환등상(phantasmagoria)이다. 성북예술가압장 전시는 서로 다른 방향과 속도로 흘러가는 세 점의 작품들이 어우러지면서 몽환적인 극장 같은 효과를 만들어냈다. 얼핏 20세기 이전에 유행했던 매직랜턴이나 파노라마 같은 광학장치를 연상시키지만, 작가의 관심사가 매체의 역사적 기억 같은 곳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이 형식은 문구점에서 산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어린아이가 그 장치에 매혹되는 것 같은 느낌에 더 가깝다. 요컨대 정희정은 개인적 매혹과 혐오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유형의 작업과 정희정의 작업의 유사점은 거기까지이다. 정희정이 보여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내면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겉보기와 달리 정희정의 작업은 매우 외향적이다. 파노라마와 환등상은 외부 세계와 구별되는 개인적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갑의 안팎이 뒤집히는 것처럼, 외부가 거꾸로 투영된 장소이다. 세계는 내 피부의 연장이며, 내 뇌수이며 내 심장이다. 사물들, 동식물들, 풍경들은 부풀어 오르며 내장 같은 속살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또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부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공간은 꿈의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 진부하기까지 한 일상이다. 작가는 항상 평범한 실내 공간이나 특정한 풍경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버려진 공터, 아파트 놀이터, 축대와 폐가가 있는 풍경 등, 개발의 이면에 버려진 공간을 찾아다닌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지리학적 탐사처럼 보이지만, 사회비판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아니다. 이 탐사는 세계의 혼돈을 겨냥한다. 정희정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단일한 시점에 의해 세계를 정돈하는 데 관심이 없었던 중세의 두루마리 그림을 연상시킨다. 이 세계 속에서 사물들은 인과관계를 상실하고 각자 자신의 존재감을 주장한다. 이 욕망의 세계는 무절제하고 과도하다. 그런데 이 과도함이야말로 정희정 작업의 최대 매력이다. 정희정의 작업은 타자와 나를 분리시키는 ‘취향’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당혹스러운 지점에서 자기 존재감을 갖는다. 이 감성을 키치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키치성을 어떤 저항이나 풍자의 코드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정희정에게서 키치성은 세계 그 자체가 갖는 ‘리얼리즘적’ 성격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