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풍경 속을 가로지르는 시선

[정희정: 풍경(風景)] 2015 경기도미술관 생생화화
안소연 미술비평가

풍경(風景)에 대한 생각

근대의 산책자(flâneur)들은 변화하는 대도시의 일상을 배회했다. 현실의 거대한 풍경을 좇는 군중 속에서 시대의 풍경을 바라봤던 산책자들의 시선은 현실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사실 소외는 일종의 시각적 특권이기도 했다. 그것은 공공의 시각 경험이 누릴 수 있는 익명의 관음적 바라보기를 철저히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그처럼 모더니티의 공간을 어슬렁거리던 산책자들은 당대의 모던한 삶에 둘러싸여 새로이 “재현된 풍경”을 시각적으로 경험했다. 하지만 근대 산책자들이 구축한 “바라보기”의 신화가 얼마나 표피적이며 왜곡된 것이었는지는 이미 분명해졌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안에서 시각우위의 질서체계는 숱한 의심의 표적이 되어 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진작부터 현실의 풍경을 어떻게 체험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넘어온 것이다.

지난 세기의 현대미술은 시각 메커니즘을 규명하려는 예술가들의 지적 논쟁으로 팽창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경험이 수차례 도전받고 전복되는 가운데 고정된 시각의 우위성은 무너졌고, 이내 모더니티 공간에서 배제되었던 시각의 일면이나 새로운 감각의 경험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현실 세계를 재현하기 위한 시각적 공식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진 작가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개척했고 이로써 동시대미술의 다양성을 예언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동굴에 갇혀 있는 것처럼 재현된 세계 안에 거주하고 있기에 “바라보기”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인가, 유독 현실의 풍경에 집착하는 동시대의 작가들은 그것으로부터 주체의 불완전한 시각 경험을 드러내려 부단히 애를 쓴다.

사뭇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장황한 설명으로 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일련의 작업을 《풍경(風景)》이라는 제목으로 풀어낸 한 작가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위함이다. 경기도미술관 《생생화화 2015》에 참여하는 정희정의 작업에 대한 비평을 요청받은 나는, 미술관 워크숍 참여와 세 차례의 작업실 방문을 통해 그의 전시 준비 과정을 조금이나마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몇 번의 이메일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듣고 말했다. 전시를 앞두고, 그가 작품 목록 일부를 적어 보낸 문서파일은 “풍경(風景)”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곧 내 비평 글의 중요한 관점이 될 “깨진 거울에 반사된 풍경”이라는 문구를 적어 보냈는데, 그날 나는 그의 작업을 “풍경”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는 것에 공감했고, 그도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바로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정희정은 작업에서 늘 풍경을 다뤄왔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 세계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상상의 비현실적 공간에 이르기까지, 그가 풍경을 작업의 주요 모티프로 삼은 것은 분명하다. 특히 그의 작업에서 주를 이루고 있는 사진 작업을 보면, 산책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엿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대도시가 아닌 도시의 변두리-대도시에 기생하고 있거나 한 때 대도시였을지도 모를 폐허-를 걷고 있다. 그의 작업에선 산책자로서의 바라보기가 아닌 현실의 공간에 깊이 연루된 은밀하고 모호한 내부자의 시선마저 감지된다. 그는 사진으로 기록한 풍경사진에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고, 실제의 현실 풍경과 그가 조작한 풍경을 교묘히 뒤섞어 버린다. 어느 때는 사진이 촉발시키는 모호한 풍경의 이면을 캔버스에 다시 옮기기도 한다. 그래서 그가 묘사하고 있는 현실 기반의 풍경은 상당히 불온하고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나는 그가 묘사한 풍경들이 하나의 총체적인 공간일 거라고 믿지 않는다. 그것은 깨진 거울에 반사된 풍경처럼 애초에 모순과 파열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진 거울에 반사된 낯선 풍경

정희정의 작업은 주로 사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앞선 두 차례의 개인전 《청산별곡》(2013)과 《밤과 낮》(2013)만 보더라도, 그의 작업은 일상의 현실 공간을 담은 풍경 사진에서 출발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접근한 사진 작업 12점이 소개된다. 큰 범주에서 볼 때 그의 사진은 연출 사진에 가깝다. 작가는 직접 촬영한 원본 사진을 임의로 변형시키고 조작하여 원본으로부터 벗어난 허구의 알리바이를 꾸민다. 언뜻 사진 속 피사체들에서는 어떤 사건 전후에 감도는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 눈에도 가짜임이 들통 날 법한 정희정의 사진은 시점도 시공간도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허구일 뿐이다. 그는 그것을 교묘하게 숨기기는커녕 되레 편집에 의해 재구성된 현실의 몽타주임을 적나라하게 밝힌다. 사진의 사실성을 의도적으로 해치려드는 그의 제스처는, 오히려 현실을 살짝 비틀면서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비현실적 풍경들이 차츰 드러나게 한다.

웹아트 형식으로 제작된 그의 초기 작업 (2003)과 (2004)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가 일상의 현실 공간을 기반으로 허구의 사건을 상상하거나 조작하고 있음을 보다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원천으로 재가공한 허구의 풍경은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이다. 이때 그는 실제의 풍경과 조작된 허구의 풍경을 가로지를 수 있는 도구로써 카메라의 시각을 빌려온다. 예컨대, 초기 작업에 해당하는 의 첫 장면이 카메라 셔터에 손을 올려놓은 작가의 등장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분명한 시각 프레임의 변화를 암시한다. 또한 의 경우, 아예 파노라마로 편집된 연속 화면이 실제 현실의 공간을 매우 비현실적인 스케일로 변형시켜 놓았다. 현실의 공간은 카메라 프레임에 의해 절단되면서 비현실적인 경계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정희정의 사진은 바로 그 경계를 상상케 한다.

평소 그는 카메라로 일상의 풍경들을 수집한다. 그는 자신의 주거지인 안양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도시 공간을 경험해왔다. 있던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전에 없던 것이 생겨나는 도시 재개발의 풍경은, 어찌 보면 터무니없이 왜곡시켜 버린 정희정의 사진처럼 믿기 어려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 중 <저녁의 창>을 보면, 오래된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공아파트의 풍경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사진으로 <오후4시>, <장밋빛 인생>, <장마> 등도 있는데, 작가는 이 오래된 장소가 함의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차원에 접근했다. 그것은 구식 아파트에 남아있는 과거의 진보적인 에너지와 쓸모없는 퇴물로 밀려나게 될 현재의 무력함이 묘하게 뒤섞인 풍경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각각의 사진들에는, 적어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복잡하게 덧씌워져 있다. 녹슨 철골, 칠이 벗겨진 외벽, 구식 놀이터 등이 한때의 역동적인 유행의 대열에서 밀려나 나태하기 이를 데 없는 구식 물건의 낯선 표상이 된다. 상대적으로 방치된 듯 거대하게 번식한 나무와 수풀의 원시성은, 그 풍경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자꾸 위협한다.

정희정은 이 언캐니한 현실의 상황을 한껏 극대화한다. 특유의 빛바랜 색채와 구식 건축물, 텅 빈 거리, 무성한 수풀 등이 사진 속 수수께끼 같은 풍경을 더욱 모호하게 어지럽히고 있다. 분명 평범한 주공아파트의 풍경인데, 마치 파리의 텅 빈 거리를 기록했던 앗제(Eugène Atget)의 사진처럼 완전한 인간의 부재가 그 찰나의 순간을 매우 비현실적인(혹은 초현실적인)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빈번하게 사용했던 수법이기도 한 이 언캐니의 표상은, 흔히 프로이트가 말한 “낯익은 것의 소외”로 설명된다. <오후4시>, <저녁의 창> 등 일련의 사진에서 주요 피사체가 된 오래된 아파트의 외벽은 서로 상관없는 다른 장소에서 발견된 것들이지만, 사실 사진 속의 낡은 주공아파트들은 한 번쯤 그곳에 가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는 낯익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언캐니한 감정은 그런 것이다. 낯선 시공간에서 뜻밖에 경험하게 되는 익숙한 감정으로, 프로이트에 따르면 “억압에 의해 낯선 것이 되었으나 원래는 익숙했던 현상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저 구식 아파트가 있는 낯선 풍경을 시각적으로 반복해서 경험하면서 동시에 현실 너머의 불확실한 기억들과 마주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언캐니한 상황의 경험은 끝내 그 불확실한 실체를 알아내지 못한 채 주체가 겪어야 하는 불안과 맞닿아 있다.

<오후4시>에서, 구식 아파트의 파사드와 멈춰버린 놀이기구들은 언뜻 모든 것이 소진된 과거의 묵직한 잔재처럼 보인다. 당시 신식 건축물이 상징하는 역동적인 에너지와 놀이기구에 잠재되어 있는 회전하는 운동성이 돌연 거대한 나무 수풀에 묶여 완전한 정지 상태로 전락해 버린 것 같다. 이처럼 정희정은 도시 변두리에 유물처럼 남아있는 과거의 잔재와, 그 에너지를 집어삼켜버림으로써 동시에 그것을 집요하게 환기시킬 수밖에 없는 현실의 수상한 기운을 목격했다. 그 오래된 건축물들은 여전히 현실의 풍경에 존재하지만, 그 육중한 골격에도 불구하고 이미 유령 같이 희미한 잔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태 초현실주의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의 도전해 온 것처럼, 정희정은 멈춰버린 풍경 안에 흐르고 있는 다른 차원들을 상상하고 있다. <저녁의 창>에서는 낡은 건물의 적막함과 유난히 대비된 밝은 불빛이, <오후4시>에서는 정지된 놀이터를 장악하고 하며 거대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나무와 길 고양이가, <장밋빛 인생>에서는 나무 밑에 버려진 큰 곰 인형이 그러한 비현실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그의 사진에는 종종 현재의 풍경을 가로질러 우회하는 또 다른 통로가 존재한다. 대도시의 큰 길을 배회하던 근대의 산책자들과 달리, 정희정은 어쩌면 길조차 아닌 곳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장마>, <검은 입>, <밤 눈>에서, 그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배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우울하고 낯선 사진 속 풍경에서, 우리는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을 발견한다. 세 개의 사진에서는 폐허를 뒤덮은 원시적 생명력이 곧 현대의 스펙터클한 풍경마저 죽음에 이르도록 집어삼킬 것이라는 암시가 강하게 묻어난다. 대도시의 풍경은 애초에 자연을 고립시키고 은폐해두었으나 언젠가 감추고 억압되었던 것이 되살아날 때 현실의 연속적인 풍경은 뒤틀어지고 전복될 수밖에 없다. 정희정의 시선은 항상 우리가 쉽게 알아채지 못하거나 간과하기 쉬운 그 파열의 지점에 머문다. 과거였을지도 모를 현실의 환영마저 집어삼킨 <검은 입>처럼, 그는 매번 비현실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의 작은 파열들을 강박적으로 찾아다닌다. 때문에 그가 제시하는 사진 속 풍경은 깨진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매우 분열적이라 일반적인 산책자들의 시선을 방해한다.

불온한 현실 공간에서 비현실적 풍경으로의 진입

오래 전부터 정희정은 자신의 시선을 끄는 일상의 소소한 풍경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그때마다 사진기로 찍어둔 일상의 장면들이 이제는 제법 된다. 어느 때부터인가, 거의 충동적으로 포착한 풍경 사진들에서 예기치 않게 그는 수수께끼 같이 숨어있는 파편들을 발견하곤 한다. 현실에 난 작은 균열들은 언젠가 그 현실을 무참히 무너뜨릴 수도 있는 불온한 것들로, 작가의 비현실적 상상을 자극해 왔다. 결국 그는 눈에 띄지 않던 균열을 더 교란시키고 확장시키려는 듯 했고, 자신이 찍은 현실의 사진들을 조작하고 왜곡시키고 복잡하게 변형시켜 놓았다. 그런 맥락에서, <나의 플래시 속으로 갑자기, 흰>은 훨씬 더 노골적인 작가의 태도를 보여준다. 사진의 구조를 먼저 한 번 살펴보자. 밤하늘의 달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공간의 분리는 화면 오른쪽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의 완전한 암흑과 화면 왼쪽의 나무숲을 강하게 비추는 불빛으로 나뉜다. 그리고 그 강한 불빛을 받고 있는 나무 아래로 토끼 가면을 쓴 한 사람이 서서 카메라의 시선을 응시하고 있다. 이는 잘 짜인 연극무대처럼 하나의 연출된 장면의 허구성을 드러내지만, 현실에서 충분히 경험된 공간이 환기시키는 사실성 또한 배제할 순 없을 것이다. 연출된 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작가의 시선은 어느새 그 경계마저 흐릿해져 단순한 현실의 몽타주가 아닌 반투명한 유리창처럼 한데 뒤섞여 있는 형국이다.

이렇듯 정희정의 풍경 사진은 현실과 비현실의 모순된 경계를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진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정희정은 애초에 사진이라는 매체적 특성에 기반한 작업은 아니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회화를 위한 리서치 용도로만 동원된 것도 아니다. 사실 그는 어떤 목적을 두고 풍경 사진에 연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을 시각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카메라 또한 하나의 도구로 활용한 것에 가깝다. 그래서 이번 전시만 보더라도, “풍경”이라는 주제 아래 사진, 회화, 영상이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 각각의 차별적인 지점을 드러내준다. 이번 전시에는 사진 외에, 10점의 회화 작업도 전시됐다. 이 작업들은 정희정의 회화에 배어 있는 초현실적 사고의 흐름들을 잘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서, 사진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비틀어 놓는 외부자의 시선에 가깝다면, 회화는 그 부조리한 경계로 들어가 새로운 비현실적 풍경을 구축하는 수행적 시선이라 할 수 있겠다.

단적으로 <검은 연기>와 <바람의 집>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풍경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그 풍경을 현실에서 갖고 왔단다. 그는 어느 때인가 그 풍경을 목격했고 그것을 사진으로 기록했으며 다시 그림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가 본 것, 사진 찍은 것, 그림 그린 것 사이에는 선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그것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같은 풍경을 놓고 서로 다른 시점에서 그것을 경험한 사유의 결과가 아닐까. 작가는 <검은 연기>를 보여주며, 하늘을 검게 태워버린 붉은 산을 정말 봤다고 말한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고 한다. 그렇다. 붉은/붉게 보이는 산은 어쩌면 그의 시각 경험을 뚫고 들어와 동시에 초현실적 연상 작용을 부추기며 그 시점을 비현실적 차원으로 옮겨 놓은 셈이다. 마치 우리가 꿈을 꾸듯, 보이지 않고 실체 없이 떠도는 세계로 우연히 들어가 그 세계를 구축했다가 잃어버리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희정의 회화는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들어 주체의 분열적이고 탈중심화된 시각을 모의했던 초현실주의자들의 태도와도 닮아있다.

앞서 언급했던 사진 <나의 플래시 속으로 갑자기, 흰>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서 있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처럼, 그의 회화 <정오의 그림자>에서는 이불을 뒤집어 쓴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의 사진에서 봤던 도시 변두리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배경을 뒤로 한 채 서 있는 사람은 현실의 공간에서도 비현실적 공간에서도 묘하게 벗어나 있다. 어디에도 안착할 수 없는, 어디에도 접근 불가능한, 영원히 떠도는 섬광 같은 그런 초현실적 위상을 가늠케 한다. 짐작컨대, 작가가 굳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응시가 차단된 그 유령 같은 존재는 더 이상 도시를 무심하게 산책할 수 없는 작가 자신과 동일시된 듯하다. 결국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현재를 끊임없이 낯설게 하는 주체의 경험은, 어찌 보면 풍경을 총체적으로 조망했던 도시의 산책자들의 나태하고 불온한 시선의 실체를 한껏 들추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정희정은 자신의 회화 작업을 다시 사진 찍어 파노라마 형식으로 편집한 영상 <벌거벗은 섬>을 제작하기도 했다. 간단한 모션과 사운드가 적용된 이 사계절의 영상은 유유히 흘러가는 산책자의 무심한 시선을 닮은 듯 하지만, 오히려 고정된 응시 위로 시작과 끝도 없이 연쇄하는 풍경의 착시 때문에 더 이상 본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어느 순간, 우리의 시선은 풍경 너머의 부조리한 사건이나 균열의 흔적들을 좇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풍경이 우리 눈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일상의 현실 풍경을 배회하며 훑어보다가, 문득 자신의 눈에 침투해 들어오는 이 낯선 풍경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에 잠재되어 있는 또 다른 현실이며, 그래서 가장 비현실적인 것이기도 하다.

정희정은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 자신이 해 온 사진, 회화, 영상 작업을 “풍경”이라는 지극히 평이한 단어로 느슨하게 묶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가장 평범한 단어에서 비롯된 시각 경험에 대한 오랜 사유의 흔적들을 이제야 꺼내 본 것이다. 이미 역사 속에서 수많은 작가들의 긴 행렬이 비슷한 사유의 통로들을 확보해 주었지만, 정희정은 자신의 시선이 능동과 수동을 오가며 경험한 수수께끼 같은 난제들을 풀어내고 싶었던 거다. 그것은 굳이 풍경일 필요는 없었을 테지만, 그는 우선 그가 가장 시각적으로 길들여진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현실의 풍경에 주목했을 것이고, 그 거리를 전복시키기 위해 가장 비현실적인 차원의 풍경에 자신의 나태한 시선을 내맡기는 것조차 감수했을 것이다. 때문에 정희정의 《풍경》은 가장 부조리한 현실의 풍경과 비현실적 세계를 묘하게 교차시키고 있다.